감천국민학교 동창생의 기억

태극도-대강전

피눈물을 흘릴 수 없었던 아이들 – 감천국민학교 동창생의 기억

부산 사하구 감천동.
지금은 세상 사람들이 “감천문화마을”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가 어린 시절 이곳은 결코 화려한 관광지가 아니었다. 이름조차 생경했던 “태극도촌”이라 불리던, 사이비 종교인들의 집단 거주지. 도시의 변두리, 가난이 응어리진 골짜기. 그곳이 우리의 유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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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라 불리던 시절

오늘날에는 초등학교라 부르지만, 그때는 분명히 감천국민학교였다. 교실 창문 너머로 비집고 들어오는 바닷바람과, 책보다 밥이 먼저였던 아이들의 배고픔. 칠판 위에는 한글과 산수가 적혀 있었지만, 아이들의 눈빛은 늘 허기와 싸우고 있었다.

태극도촌의 그림자

감천2동 전체가 종교촌이었다. 태극도 신도들의 움막 같은 집들은 가파른 언덕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아이들은 늘 맨발로 그 골목을 뛰었다. 도시에서 버려진 가구, 낡은 천막, 폐목재로 지은 집. 그 속에서 웃고 울며 살았다. 그러나 바깥 세상은 우리를 늘 **“사이비 종교촌의 아이들”**이라 불렀다. 낙인이자 멍에였다.

피눈물을 흘릴 수 없었던 가난

“굶주림”이란 말은 책 속의 단어가 아니었다. 하루 세 끼를 채우지 못해, 아이들 얼굴은 늘 푸석했고, 손발은 갈라졌다. 도시락은 보리밥에 소금 몇 알, 때로는 그것조차 없어서 교실에서 몰래 울던 아이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피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눈물조차 사치였으니까.

슬램가의 아이들

감천은 그저 ‘문화마을’이 아니라, 그 시절에는 부산의 슬램가였다. 좁은 골목마다 아픔이 서렸고, 어린 우리들은 그 속에서 웃음으로 서로를 지탱했다. 돌멩이 하나로 놀이를 만들고, 나무토막으로 장난감을 삼았다. 웃음 뒤에는 늘 배고픔이 숨어 있었지만, 아이들의 영혼은 꺾이지 않았다.

오늘의 감천, 그때의 기억

이제 감천은 벽화와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그러나 우리에게 감천은 여전히 **“가난과 굶주림의 교과서”**다. 관광객들이 걷는 골목마다, 우리 동창들의 눈물이 스며 있다. 누군가는 도시를 떠났고, 누군가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았다. 하지만 기억은 하나다.
우리는 모두, 피눈물을 흘릴 수 없었던 감천의 아이들이었다.